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메로베우스 왕조 (문단 편집) === 1차 분할 === [[파일:511년 프랑크 왕국 분할.webp]] 클로비스 1세는 클로틸데 왕비로부터 '''[[클로도미르]]''', '''[[킬데베르 1세]]''', '''[[클로타르 1세]]'''를 낳았고, 클로틸데 이전에 결혼했던 성명 미상의 여인으로부터 '''[[테우데리크 1세]]'''를 낳았다. 511년 클로비스 1세가 파리에서 사망한 후, 네 아들은 왕국의 영토를 4개로 분할했다. 수아송은 클로타르 1세에게, 파리는 킬데베르 1세에게, 랭스는 토리데리크 1세에게 주어졌고, 오를레앙은 클로도미르에게 맡겨졌다. 515년, 데인족이 테우데리크의 영역에 쳐들어와서 주민들을 포로로 잡고 배에 태운 후 본국으로 돌아가려 했다. 이때 데인족의 왕 하이겔라크는 마지막으로 승선하려 했다가, 테우데리크가 급파한 강력한 기병대의 급습을 받았다. 데인족은 크게 패해 뿔뿔이 흩어졌고 헤이겔라크는 전사했으며, 그들이 가지고 가려던 노획물을 전부 회수했다. 전설에 따르면, 헤이겔라크의 뼈는 라인 강 어귀의 섬에서 종종 목격되었다고 한다. 523년, 킬데베르 1세, 클로도미르, 클로타르 1세는 부모를 처참하게 죽인 곤데바우드의 아들이자 부르군트 왕인 지기스문트에게 복수하려는 어머니 [[클로틸데]]의 부추김에 따라 [[부르군트 왕국]]을 공격했다. 지기스문트는 일찍이 딸 수아베코테(Suavegothe)와 테우데리크 1세의 결혼을 주선해 그의 지원을 받기를 원했지만, 테우데리크 1세는 별다른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결국 지기스문트는 프랑크족에게 패배한 뒤 사로잡힌 후 왕위에서 물러난 뒤 오를레앙으로 끌려갔다. 프랑크군이 작전을 완수하고 돌아간 뒤, 지기스문트의 형제 고도마르 3세는 [[테오도리크 대왕]]의 지원에 힘입어 부르군트 왕국을 탈환한 뒤 클로도미르가 남겨뒀던 프랑크 수비대를 학살했다. 이에 분노한 클로도미르는 524년 5월 1일 지기스문트와 그의 아내 및 아들을 살해한 뒤 이들의 유해를 우물에 던지게 했다. 그 후 테우데리크 1세를 설득하여 부르군트 왕국에 대한 2번째 원정에 함께 착수하게 했다. 그러나 524년 6월 25일 베체롱체 전투에서 거짓으로 후퇴하는 적을 추격했다가 매복에 걸려 전사했고, 그의 수급은 베어진 뒤 창 끝에 꽂혔다. 클로도미르의 세 아들들은 어머니 곤테우크에게 양육되다가 곤테우크가 클로타르 1세와 결혼하면서 클로타르 1세의 수중에 들어갔다. 클로타르 1세와 킬데베르 1세가 클로도미르의 영지를 양분하려 하자, 클로틸데는 이에 맞서 클로도미르의 세 아들의 권리를 보호하려 했다. 그러나 클로타르 1세와 킬데베르 1세는 어머니의 반대를 뿌리치고 클로도미르의 영지를 양분했고, 클로도미르의 세 아들 중 테오데발트와 군타르는 클로타르 1세에게 살해되었다. 오직 클로도알드만이 목숨을 건졌고, 나중에 수도자가 되었다. 클로틸데는 두 손자의 시신을 들것에 실어 성 피에르 교회에 안장한 뒤 속세에 인연을 끊고 수녀원에 들어갔다. 한편, 테우데리크 1세는 클로타르 1세와 킬데베르 1세에게 자기 몫을 달라고 요구해 트루아, 센, 오세르, 리모주를 접수했다. 한편, 테우데리크 1세는 튀링겐족의 왕 헤르만프리드에게 자신의 조카 아말라베르가와 결혼시켰다. 529년, 헤르만프리드는 공동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있던 형제 베르타차르와 내전을 벌였다. 그는 헤르만프리드를 지원하여 내전에서 승리하게 했다. 그러나 헤르만프리드는 권력을 잡은 뒤 땅을 넘겨주겠다던 약속을 무시했다. 이에 테우데리크 1세는 클로타르 1세와 손을 잡고 튀링겐을 공격하기로 했다. 531년 또는 532년, 그와 아들 테우데베르 1세, 그리고 클로타르 1세가 튀링겐을 공격했다. 이들은 운스트루트 강 전투에서 튀링겐군을 격파하고 스키팅기 왕궁을 공략했다. 헤르만프리드는 가까스로 도망쳤지만, 조카 라데군트 등 여러 왕실 인사는 붙잡혔다. 이후 테우데리크는 헤르만프리드에게 신변의 안전을 보장할 테니 투항하라고 요구하며 선물을 보냈다. 헤르만프리드는 이에 응해 줄피히(Zülpich) 성에서 그와 만나 이야기를 나눴으나, 도중에 누군가가 그를 성벽에서 밀어 떨어뜨려 죽였다. 그리하여 튀링겐 왕국은 멸망했고, 테우데리크 1세와 클로타르 1세가 영토를 분할했다. 531년, [[서고트 왕국]]의 왕 [[아말라리크]]에게 시집갔던 클로비스 1세의 딸 클로틸데가 킬데베르 1세에게 남편이 자신을 학대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에 킬데베르 1세는 여동생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서고트 왕국으로 쳐들어가 나르본에서 서고트군을 격파했다. 아말라리크는 바르셀로나로 도피했으나 그곳에서 곧 피살당했다. 그는 나르본에서 보물을 대거 거둬들인 뒤 여동생과 함께 귀환했지만, 클로틸데는 도중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망한 뒤 아버지가 묻힌 생 드니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532년, 킬데베르 1세와 클로타르 1세, 테우데리크 1세의 아들 [[테우데베르 1세]]가 연합하여 부르군트 왕국으로 쳐들어갔다. 그들은 오툉에서 부르군트 왕 고도마르 3세를 포위한 뒤 맹공을 퍼부은 끝에 534년 오툉을 함락하고 고도마르 3세를 처단했다. 이리하여 부르군트 왕국을 멸망시켰을 무렵, 테우데리크 1세가 중병에 걸려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클로타르 1세와 칼데베르 1세는 즉시 군대를 일으켜 테우데리크 1세가 다스렸던 영역을 접수하려 했다. 테우데베르 1세는 서둘러 랭스로 귀환한 뒤 전리품을 랭스 일대에 주둔한 프랑크군에게 공평하게 분배해 그들의 충성을 받아냈다. 이후 두 숙부에게 뇌물을 건네며 자신을 인정해달라고 청했고, 킬데베르 1세와 클로타르 1세는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되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536~537년, 클로타르 1세와 킬데베르 1세는 프로방스를 함께 공략한 뒤 이곳의 소유권을 놓고 분쟁을 벌였다. 킬데베르 1세는 테우데베르 1세와 손잡고 클로타르 1세를 협공하기로 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투르의 수녀원에 있던 킬데베르 1세와, 클로타르 1세의 어머니 클로틸데는 하느님에게 아들끼리 전쟁을 벌이는 것을 막아달라고 호소했다. 그러자 킬데베르 1세와 테우데베르 1세가 합세한 장소에서 번개와 천둥이 내리치고 우박이 쏟아졌다. 반면 클로타르 1세의 진영에는 비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이에 공포를 느낀 두 사람은 바닥에 엎드린 채 형제를 해치려 한 죄를 회개할 테니 용서해달라고 간청했다. 이윽고 날씨가 개이자 클로타르 1세와 화해한 뒤 즉시 철수했다고 한다. 이 무렵, 테우데베르 1세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감행한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으로 인해 동고트 왕국과 동로마 제국이 격전을 치르는 걸 지켜보면서 게피드 및 랑고바르드족과 협약을 맺어 동로마 제국이 장차 프랑크 왕국까지 공격할 가능성에 대비했다. 그러다 539년 여름 동고트 왕 [[비티게스]]로부터 "라벤나에서 포위된 우리를 도와준다면 북이탈리아 전체를 주겠다"라는 제안을 받아들여 대군을 일으켜 알프스 산맥을 넘어 포 강에 도달한 뒤 강의 양안에 진영을 세웠다. 동고트군은 그들을 환영했지만, 프랑크인들은 돌연 태도를 바꿔 이들을 물리치고 여러 도시를 공략했다. 동로마 군대도 싸움을 걸었다가 패하고 토스카나로 후퇴하였다. 동로마 역사가 [[프로코피우스]]는 그가 "갈리아에서 채굴된 금으로 볼로냐에서 금화를 주조했는데, 관습에 따라 로마 황제의 형상을 쓰지 않고 자신의 형상을 새긴 최초의 야만인 왕이었다"라며 분개했다. 그러나 프랑크 진영에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수많은 이가 죽어나가자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이후 프랑크 사절이 비티게스를 접견하여 동맹을 제안하였으나, 저번 침략을 기억하던 비티게스는 이를 불신해 거부했다. 541년, 테우데베르 1세는 알레만니 장군 부틸루스를 이탈리아로 파견해 리구니아 일부 지역과 알프스 산맥 지역 및 대부분의 베네티 지역을 공략하고 공물을 부과하게 했다. 한편 541년 또는 542년, 클로타르 1세와 킬데베르 1세는 공동으로 피레네 산맥을 넘어 서고트 왕국의 도시 사라고사를 포위했다. 비록 함락에 실패했지만, 그들은 이베리아 반도 북부 지역을 약탈해 막대한 전리품을 챙기고 귀환했다. 547년 말 또는 548년 초, 테우데베르 1세가 사망하고 아들 [[테우데발트]]가 아버지의 영지를 물려받았다. 그 직후 동고트 왕국의 토틸라와 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사절단이 랭스에 찾아와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테우데발트는 고심 끝에 어느 쪽도 공개적으로 돕지 않고 관망하는 태도를 취하기로 했다. 하지만 선왕이 중용했던 알레만니 족장 레우타리스와 부틸리누스 형제가 출정을 강력히 주장하자, 결국 허락했다. 아가티우스에 따르면, 알레마니 족이 주축이 된 7만 5천 명의 게르만 대군이 553년 초엽에 알프스 산맥을 넘었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접한 동로마 장성 [[나르세스]]는 시칠리아에 주둔해 있던 아르타바네스의 군대를 소환하여 아펜니노 산맥의 고갯길에 주둔시켰다. 한편, 침공군은 북이탈리아의 동로마 거점이었던 파르마를 함락하였다. 그곳의 로마군은 헤룰리 용병이 대다수였는데, 지휘관 풀카리스는 패배 이후 파벤티아(파엔차)로 후퇴하였다. 그리고 겁을 먹은 아르타바네스도 역시 파벤티아로 철수하였다. 이후 나르세스의 독촉을 받아 다시 파르마로 북상하였고, 피사우룸에서 훈족 용병대와 게르만 부대의 퇴로 차단을 맡았다. 7만 대군의 기세를 회전으로 막기 불가능 하다는 것을 느낀 나르세스는 이탈리아 중남부 일대의 도시들에 수비대를 분산 배치하였고, 자신은 나머지 군대를 모아 이듬해 봄까지 로마시에 주둔했다. 554년 초엽, 프랑크군은 이탈리아 중부를 약탈하고 삼니움까지 남하했다. 레우타리스와 부틸리누스는 병력을 둘로 나눠서 양갈래로 진군해 이탈리아 남부를 공격하기로 했다. 레우타리스는 아풀리아, 부틸리누스는 칼라브리아와 캄파니아로 진격하기로 했다. 그러다가 레우타리스가 방향을 돌려 본국으로 귀환하려 하자, 아르타바네스의 군대가 피사룸 인근에서 기습 공격해 선봉대를 궤멸시켰다. 이후 레우타리스의 패잔병들은 알프스 산맥을 넘는 여정에서 전염병의 습격을 받았고, 레우타리스 본인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죽어나갔다. 한편, 부틸리누스의 군대는 고트족들과 합세하여 칼라브리아 일대를 약탈하였는데, 전염병에 걸려 3만의 군대가 2만 명으로 축소되었다. 554년 늦여름 경에 캄파니아로 회군, 마차를 둥글게 모아 숙영지를 세웠고 볼투르누스 강의 다리를 지키기 위해 큰 탑을 지었다. 이후 18,000명의 동로마군이 현지에 도착해 탑에 불을 질러 주도권을 장악했다. 이어진 회전에서, 프랑크군은 완패했고 부틸리누스는 전사했다. 프랑크군이 이탈리아에서 섬멸당하고 있을 무렵, 테오데발트는 허리가 아파서 곧게 펴지 못하는 등 중병에 시달리다가 555년 11월 또는 12월에 사망했다. 테오데발트의 아내이자 랑고바르드 족장의 딸 부데트라다는 자식을 낳지 못했다. [[클로타르 1세]]는 테오데발트가 사망하자 즉시 영지를 접수하고 부데트라다와 결혼했다. 그러나 주교들이 이 일에 비난을 퍼붓자 부데트라다와 이혼하고 비이에른 공작 가리발트 1세에게 부데트라다를 시집보냈다. 그 후 동로마군은 556년 프랑크군을 북부 이탈리아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한때 테우데베르 1세가 정복했던 땅에 대한 로마 제국의 권력을 회복했다. 이 무렵, 파리와 오를레앙에서 군림하던 킬데베르 1세와 클로타르 1세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이와 동시에, 클로타르 1세의 아들 크람도 아버지에게 반감을 품고 킬데베르 1세와 손을 잡으려 했다. 클로타르 1세는 아들을 달래고자 오베르뉴로 보내고 그에게 왕에 버금가는 칭호와 권한을 내렸다. 그러나 크람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킬데베르 1세의 지원을 받고 아버지를 축출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크람은 파리로 가서 킬데베르 1세 앞에서 "저는 이제부터 아버지의 최악의 적이 될 겁니다."라고 맹세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반란이 터지면서 프랑크 왕국이 혼란에 빠지자, 일부 아키텐 귀족들은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아키텐 왕국'을 세웠다. 클로타르 1세는 또다른 아들 카리베르 1세와 군트람을 보내 크람을 토벌하게 했다. 두 아들은 리모주에서 크람을 포위했지만, 크람이 클로타르 1세가 색슨족과의 전투 도중 전사했다는 거짓 소문을 탈영병을 통해 퍼트리자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크람은 그 틈에 잃어버린 영토를 확보하고자 노력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뒤늦게 아버지가 건재하다는 걸 알게 된 카리베르 1세는 회군하여 크람을 압박해 들어갔다. 그러던 558년, 킬데베르 1세가 상속인 없이 사망하면서 파리-오를레앙 일대마저 클로타르 1세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로써 프랑크 왕국 전역이 클로타르 1세에게 귀속되었다. 이리하여 동맹을 잃은 크람은 브르타뉴로 피신한 뒤 항전을 이어갔다. 560년, 클로타르 1세는 브르타뉴 원정에 착수하여 브르타뉴 백작 차나오를 격파했다. 크람은 패전 소식을 듣자 배를 타고 바다로 도망쳤지만 아버지가 급파한 추격대에게 따라잡혔다. 클로타르 1세는 끝까지 저항한 아들에게 분노한 나머지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두 손녀를 오두막에 가둬놓고 산채로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사형 집행인들은 너무 잔혹하다고 여겨 몰래 그들을 먼저 교살한 뒤 시신을 오두막에 안치한 후 불태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